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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史

너무 추레해진 이건창 생가 지붕 이건창 생가에 갔더니, 저런, 비가 새는 모양이다. 출입문 초가지붕을 저렇게 덮어 놓았다. 본채 지붕도 너무 삭아서 푹 주저앉았다. 비가 많이 오면 여기도 샐 것 같다. 가뜩이나 옹색하게 복원한 생가인데, 지붕마저 저러니 애처롭다. 생가인가, 아닌가, 문화유산으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오래도록 논란이었다. 심지어 문화유산 취소를 요구하는 재판까지 벌어졌다. 그래도 어쨌든 인천광역시 지정문화유산(기념물)이다. 적절한 관리는 당연하다. 어서 지붕을 새로 올렸으면 좋겠다. p.s. 아직 공식발표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최근에 대법원이이건창 생가가 문화유산 가치가 있다고 최종 판결했다고 한다. 법적으로 이건창 생가를 인정한 것이다. 더보기
강화도 돈대의 역사 ② 이 글은 강화도시민연대, 강화역사문화연구소, 강화시민회의가 주최하고 강화뉴스가 주관한 ‘강화돈대의 날 제정을 위한 강화돈대 재발견 토론회’(2025.06.30.)에서 발제한 원고, ‘강화 돈대의 어제와 오늘’ 전문입니다. 각주(脚註)는 살리지 못했습니다. 2회로 나눠 올립니다. ①-Ⅰ.서론 Ⅱ.돈대 축조 배경 Ⅲ.돈대 축조 과정 ②- Ⅳ.돈대 정비 경과 Ⅴ.결론 Ⅳ. 돈대 정비 경과 1. 돈대를 추가하다 1679년(숙종 5)에 48돈대가 설치됐습니다. 그 뒤 6개 돈대가 추가되면서 총 54개 돈대가 강화도 해안 동서남북에 들어섰습니다. 추가되는 첫 번째 돈대는 검암돈대(선수돈대)인데요, 축돈한 해가 언제인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강화 돈대 연구의 개척자인 배성수에 따르면, 1690년.. 더보기
강화도 돈대의 역사 ① 이 글은 강화도시민연대, 강화역사문화연구소, 강화시민회의가 주최하고 강화뉴스가 주관한 ‘강화돈대의 날 제정을 위한 강화돈대 재발견 토론회’(2025.06.30.)에서 발제한 원고, ‘강화 돈대의 어제와 오늘’ 전문입니다. 각주(脚註)는 살리지 못했습니다. 2회로 나눠 올립니다. ①-Ⅰ.서론 Ⅱ.돈대 축조 배경 Ⅲ.돈대 축조 과정 ②- Ⅳ.돈대 정비 경과 Ⅴ.결론 Ⅰ. 서론 돈대(墩臺)는 군사적 요충지에 설치된 관방시설(關防施設)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미 조선 전기부터 돈대의 존재가 사료에서 확인됩니다만, 그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돈대의 기능과 결이 조금 달랐습니다. 조선 후기 숙종 대에 강화도에 집중적으로 설치되는 돈대는, 해안경계 초소 성격입니다. 군사들이 돈대에서 경계근무를 서며 괴선박의 출현.. 더보기
[보도자료] 강화군, 국회서 국립강화고려박물관 건립 필요성 집중 조명 강화군(군수 박용철)은 2일 국회의원회관 제1세미나실에서 ‘국립강화고려박물관 건립 필요성 토론회’를 개최했다고 밝혔다. 이번 토론회는 고려시대 수도였던 강화의 역사적 가치와 정체성을 재조명하고, 국립박물관 건립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 배준영 국회의원실이 주최하고 강화군이 주관했다. 토론회는 배준영 국회의원의 개회사로 시작해, 박용철 강화군수와 한승희 강화군의회 의장의 인사말이 이어지며 본격적인 논의의 장이 열렸다. 현장에는 역사 및 문화 분야의 전문가들이 다수 참석해 국립강화고려박물관 건립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향후 정책 추진 방향에 대한 발표와 토론을 이어갔다.기조 강연에 나선 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항몽민족사의 상징, 국립강도고려박물관’을 주제로 강화 고려궁성의 현.. 더보기
박신, 갑곶나루, 염하 강화해협, 염하 강화읍 월곳리 연미정쯤에서 길상면 초지리 황산도 어름까지, 김포와 마주한 좁은 바다를 강화해협이라고 합니다. 염하라고도 하고요. 김포로 보면 월곶면 보구곶리에서 대곶면 약암리까지입니다. 길이가 17㎞ 정도, 폭은 넓은 곳이라야 1㎞ 남짓, 좁은 곳은 300m 정도입니다. 한강보다도 좁습니다. 그래서 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육지 사이 좁고 긴 바다를 해협(海峽)이라고 하기에 강화해협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상어로는 강화해협보다 염하라는 호칭을 더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사랑에 빠진 남자 강원도 강릉에 경포호가 있습니다. 거기 있는 경포대라는 누각이 유명하죠. 경포대 근처 길가에 아기자기한 동상이 여럿 서 있어요. 박신(朴信, 1362~1444)의 사랑 이야기를 몇 장면.. 더보기
'강화돈대의 날' 제정을 위한 토론회 안내 더보기
[스크랩] 진관사 태극기 최초의 태극기는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조인식에서 역관 이응준이 사용한 것이다. 조선은 국기 제정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도안을 미루던 차였다. 1882년 5월 14일 미국 공사 로버트 슈펠트는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식에 사용할 국기를 지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통리기무아문 김홍집이 역관 이응준에게 국기를 그리게 해 최초로 사용했다. 이전까지는 박영효의 태극기가 최초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2004년 이응준 태극기가 미국에서 처음 발견되면서 최초로 인정받았다. 1910년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멸망하면서 태극기 사용이 금지됐다. 이때부터 태극기는 독립운동의 상징이 됐다. ‘진관사 태극기’도 1919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장기 위에 먹으로 태극과 4괘를 덧칠해 태극기로 만든 유일하고 가장 오.. 더보기
강화역사신문, 〈강화역사심문〉 제4호 발간 강화의 역사를 소개하는 계간 신문 〈강화역사심(沁)문〉 제4호(2025.6)가 나왔다. 이번 호에는 신미양요 기록 사진과 해설, 강화 참성단 천재궁 터, 《속수증보강도지》, 황사영 백서, 강화도조약의 과정, 의병장 이능권, 보창학교, 족실방죽(쪽실방죽) 이야기, 화남 고재형의 한시-월곶동(《심도기행》)이 실렸다.배부처는 강화읍 청운서림, 강화읍 디자인센터산, 선원면 프란츠(쓰) 카페 등이고, 발행처는 강화역사문화연구소이다.발행인 김형우 소장, 편집인 전동광 연구위원. 더보기
강화 참성단 천재궁 터 고려 때도, 조선 들어서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하늘 제사를 올렸습니다. 임금이 고위 관료 중에서 제사 책임자를 선정해 강화로 보냅니다. 참성단 제사의 책임자를 보통 행향사(行香使)라고 불렀어요. 행향사로 강화에 왔던 인물 가운데 이방원도 있습니다. 물론 조선 태종으로 즉위하기 전, 고려 조정에서 벼슬할 때였습니다. 행향사가 와서 묵으며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할 장소가 필요합니다. 제사 음식 준비도 해야 하고요. 그곳이 바로 마니산 북쪽 기슭, 화도면 문산리에 있던 재실, 천재궁입니다. 지금은 터만 남았으나, 옛날에는 제관들의 숙소와 제기 보관소를 비롯해 여러 건물이 있었을 겁니다. 목은 이색(1328~1396)이 지은 시에 따르면 앙산정(仰山亭)이라는 정자도 있었습니다. 천재궁 가는 길 들머리에 금표도.. 더보기